포드 V 페라리 를 봤다.
보기 전에는 별로 기대가 안됐다.
미국 영화니 당연히 포드가 이길 것이고 두남자의 우정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어서
수세기 동안 해 온 얘기의 연장선이겠구나 싶어 거부감도 들었다.
게다가 배경은 1960년대.
얼마나 마초적으로 남성 스포츠로 치부되는 레이싱을 그려낼지 안봐도 비디오였다.
물론 여전히 불편한 지점들이 존재했지만 2시간 30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동안 집중해서 봤다.
사실 보기 전부터 조금이라도 루즈해지면 바로 자겠다고 선언했는데 (아이리쉬맨에 크게 데여서) 단 1분의 잡념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절로 잡념이 없는 '너무' 순수한 켄의 감정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 자면 켄은 걱정이 많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자 꿈을 쫓는 이로서 생계유지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끊임 없이 고민을 해야 하는 위치이다.
그러나 켄은 그렇지 않다.
남성 중심 특히 아버지 중심의 서사에서 보이는 고뇌 과정이 강조되지 않는다.
그의 세상에는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레이싱 그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단순하다.
이상하게도 그럼에도 켄은 무책임해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켄의 매력이다.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멋있는 남성 캐릭터였다.
항상 노력이 부족하다 열심히 해야 한다를 강조 받는 사회에서 사는 내가 보았을 때 켄은 스스로를 쥐어짜지는 않지만 해야할 일을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사실 개운하기 보다는 찝찝함이 더 컸다.
켄의 비극적인 마지막이 남긴 찝찝함이 아니라 포드의 존재감이 남긴 찝찝함이었다.
아마 영화를 보고 포드에 대한 로망이 생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 속 페라리 회장이 지적했던 것처럼 과시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다니는 자동차 회사 회장이라니..ㅎ
몰입하고 있는 가치가 자동차인지 돈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켄이 결국 포드 측의 제안을 수용한 것에 대해서 켄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슬프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레이스 그 자체이고 그 속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것 일뿐,
그 외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일테니 말이다.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앞서 나가는 아름다운 켄의 질주를 보고 난 후에야 끊임 없이 통제권을 쥐려고 잡음을 만드는 비브가 이해가 됐다.
비브에게 르망은 그저 모토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른 차보다 뛰어난 것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할 뿐 그 속에 선수는 역시 교체 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고
인간이 그려내는 스포츠 보다는 마케팅 적으로 만들어내는 그림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그림.
이 말을 듣고 가장 화가 났다.
개입하고 조작하는 것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속을 들여다 보면 한 사람의 도전이 있고, 사람들 간의 신뢰가 있고, 가족이 있는 아름다운 스토리를
포드라는 거대 자본이 가리고 있다는 것을 보고 나니
거대 자본주의로 굴러가는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회사와 집단에 가려져 있을 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많을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러한 고민을 하게 한다는 점이 포드 V 페라리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몰리를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몰리는 현실에선 어디에도 없지만 전근대적인 컨텐츠에선 어디에나 있는 그런 아내였다.
생계를 걱정하면서도 남편이 꿈을 잃지 않도록 두둔해 주며
남편의 꿈을 완벽히 이해해주어 티키타카가 가능하고
남편의 꿈을 묵묵히 바라봐주는 그런 이상적인 아내.
나름대로 너무 고리타분한 현모양처 스타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는지
첫 등장이 꽤나 도발적이고 과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것도 전부 너무 뻔했다.
모릴가 등장하는 장면은 죄다 작의적이었다.
알탕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주어진 여자 캐릭터인데 성의가 없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포드 V 페라리가 정말 그저 그런 뻔한 알탕 영화였으면 이러한 아쉬움도 없었겠지만
웰메이드라 더욱 괘씸하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이다.
전율하는 엔진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극장에서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