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가 보고싶어 를 읽었다

신가오 2019. 11. 12. 22:31

 

정세랑 작가의 책들의 특징을 꼽으라면 나는 인류애를 꼽겠다.

정세랑 월드는 참 무해하다.

악역 없이도 갈등은 충분하다. 

꼭 평범한 우리가 사는 세계 같다.

멀리서 보면 큰 탈 없이 잘 굴러가는 것 같은데

쓱 고개를 집어넣으면 삐걱삐걱 굴러가는 게 보인다.

그 완벽하지 않음이 만드는 삐걱거림이 참 사랑스럽다.

매끈하게 다듬어져 빠르게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느리고 잡음이 있지만 그러려니 하며 굴러가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나한테 정세랑 월드는 그렇다.

모두가 다 다른 생각과 모습을 하고 있어서 울퉁불퉁하고,

그래서 삐걱거릴 수 밖에 없지만

모난 부분은 있어도 뻣뻣하지 않아서 유연하게 굴러갈 수 있는 세상.

 

유전 개발자의 다음이 탐험가가 될 수 있는 세상

그 뒤를 잇는 사람은 싱어송 라이터가 될 수 있는 세상.

변수가 가득하고

예외가 가득하지만

그게 당연한 세상.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벼운 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가벼움의 힘을 아는 사람이 가볍게 쓰는 이야기는 그 무게가 다르다.

게다가 월드까지 있는 작가의 이야기라면 차원이 다르다. 

 

 

 

 

 

 

 


 

p.18
"...... 별거 없어. 결국 남는 건 사랑 이야기야. 다른 이야기들은 희미해지고 흩어지더라. 로맨스만이 유일무이한 거라고. 진부하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 어린 인간."

 

낭만에 죽고 살지만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로맨스에 대해서는 남들 다하는 걸 못해봤다.

그 흔한 인터넷 소설 그놈이 어쩌고 늑대가 어쩌고도 본 적이 없고,

드라마는 천국의 계단이 내 마지막 절절 끓는 사랑 이야기였으며

로맨스 영화도 본 게 거의 없다.

영화 노트북은 '공책'이 아니라 '랩탑'을 뜻하는 걸로 착각해서

SF영화인 줄 알았는데 최근에서야 로맨스 영화인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연애 경험도 없고 로맨스와 먼 인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도 같은 생각이다. 

결국 남는 건 사랑 이야기다.

물론 나의 사랑은 로맨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남는 건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는 동안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아마 연속적이지는 않겠지만

사랑한 순간은 영원할 테니까!

 

 

p.63 
......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했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려는 노력은 쓸데없다며 고개를 돌렸다. 재화는 용기의 좁은 세계, 그 건강하고 건전한 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재화를 내 이름으로 바꾸면 아주 잘 어울리는 문장이 완성될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나의 좁은 세계, 그 건강하고 건전한 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최근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내가 건강한 이유는 내 세계가 좁아서가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건강한 것은 아닐까.

병들었다 한들 넓은 세상 속에서 오로지 내 세계만을 견고하게 만들고 숨어있는 내가 정말 건강한 것일까.

 

그 답을 찾은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쓰면

좁은 세계를 나와 기꺼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p.65
...... 자신의 밑바닥을 숨기려는 노력을 멈출 때 수명과 상관없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결혼은 안 해야지, 만약 한다면 이왕 하는 거 세 번 은 해야지

애는 안 낳아야지, 그렇지만 애가 키우고 싶으면 어떡하지? 이런 시시껄렁한 고민을 했었다.

정말 시시껄렁한 고민이다. 

나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하려는 노력 없이, 본능 어쩌고 하는 것들을 엄청 싫어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동물의 자손번식 본능이 있기 때문에 인간도 DNA를 남기기 위한 번식을 욕망한다는 거다.

 

이 말을 최근 다시 상기시켜 준 것이 무슨 책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21세기의 인간에게 자손 번식은 DNA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만약 내가 아이를 낳고 싶다면 그것은 DNA를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아이를 매개로 나의 생각을 낱낱이 남기고 싶음이 아닐까. 

 

 

 

 

 

 

p.96 
"어홍은 달보다 어여쁘고, 달보다 더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구료" 하고 어줍잖은 수작을 하는 게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저것과 함께 생을 견뎌볼까 생각했다 .

 

내가 나 혹은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졌구나 생각하는 기준은 

상대를 귀여워하느냐 아니냐 이다. 

귀여워하는 것은 콩깍지 중에서도 제일이다. 

나의 귀여움 허들이 다소 낮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다르다. 

 

사랑에 빠져야지만 보이는 궁극의 귀여움은 아무한테나 허락되지 않는다.

와 나 미쳤나 봐.. 저게 귀여워 보여.. 가 아니라

응당 귀엽고, 정말 반박의 여지가 없이 귀엽고

그 귀여움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면 정말로 게임 끝이다. 

 

 

p.167
"그런 거 될 필요 없는 것 같아. 누구의 무엇도."
재화와 선이는 가벼운 포옹을 했다.
"그 말도 맞네. 언니는 행복할 거야."
"행복에 강박을 가지지 마. 그건 일시적인 상태일 뿐이랬어. 다들 그 일시적인 상태를 또 가져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걸 거야."

 

인간실격을 처음 읽었을 때 혼자인데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난 나만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주인공이 모습이 나와 똑같아서 내 비밀이 까발려지는 듯해 귀가 뜨거웠다.

거기서 겁쟁이는 행복해지는 일에도 겁을 낸다고 한다.

내가 그랬다. 나는 행복해 지는 게 겁이 낫다. 

그렇다고 내가 우울했다거나 불행에 젖어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의 내가 너무나 행복해서 이 정도의 자극이 아니면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있어서

항상 선을 그어두고 일부러 덜 행복한 것을 추구했었다.

'난 이만큼이면 충분해' 하고 물러나 있었다.

작은 것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하자는 취지였는데

참 의미 없는 강박이었던 것 같다.

일시적인 상태에 얽매여 계산하기보다는

일단 부딪히고 최선을 다하는 게 

한 번뿐인 인생에 미련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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