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보이>를 봤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감독 셀린느 샴마가 그려낸 10살 소녀의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몇 살인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도 어쩐지 열 살이라고 느껴졌다.
저학년은 아니고 고학년도 아니지만 분명히 그 사에에는 존재할 것 같은 느낌.
여전히 아이답지만 처음으로 두자리 숫자의 나이를 부여받게 되어 갖게 되는 묘한 의젓함이 녹아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상당히 직설적이다.
그래서 폭력적이다.
주인공은 내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저항하고 있지만 그 저항들이 거부되는 모습들은 아주 잔인하다.
파란 드레스가 나오는 장면은 애써 거부하고 있었던 현실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특히 보기가 힘들었다.
어떤 성별처럼 보인 다는 것은 참 무의미한 말이지만
로레는 남자아이들이 즐겨 입는 옷을 입고
남자아이들이 즐겨 하는 놀이를 즐기며
남자아이들 틈에서 스스로를 남자아이의 이름으로 소개하며 지낸다.
그러니 로레는 남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냐고 묻는 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로레는 남자나 여자가 아닌 로레 자신으로 살고 싶었던 것뿐이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옷차림을 고수하고 싶고, 자신의 방식대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고 싶은데
사람들과 세상이 그것은 '여성적'이지 않고 '남성적'인 것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기 때문에
그러나 그에 순응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이름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에게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로레는 단순히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남자아이들과 비슷하고 남자아이들이 주로 쓰는 이름을 댔을 뿐이데
또래는 물론이고 어른들에게 까지 아무 의심 없이 남자아이로 받아들여진다.
사실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이렇다 한들 저렇다 한들 로레가 로레인 것은 변함이 없는데,
언제든 바꿀 수 있고 아무나 바꿀 수 있는 옷가지와 헤어스타일이라는 단서로
아주 쉽게 남자아이로 받아들여진다.
몇 주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로레가 남자아이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 없던 사람들은
'파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는 사실로
진짜 이름은 미카엘이 아닌 '로레'라는 사실로
다시 로레를 여자아이로 다시 규정한다.
젠더가 얼마나 허구의 것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로레는 남자가 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사회가 규정한 남성적인 것이었고 사회가 그렇게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괴리가 생겼을 뿐이다.
이 둘은 극명하게 다르다.
열 살 로레가 뜻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로레는 거짓말을 하였고 그 거짓말을 수습하기 위해 어머니가 나선다.
그 과정은 상당히 강압적이다.
거짓말을 하였으므로 그것을 바로 잡고 사죄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거짓말을 한 사람, 거짓말을 당한 사람 모두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 양쪽 모두 수치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생각해 보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여자여도 축구를 해도 되고, 여자여도 그렇게 옷을 입어도 되고, 여자여도 그렇게 머리를 잘라도 되니 남자아이가 될 필요가 없다고 하면 괜찮을까?
어머니가 악역을 자초하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게 어머니가 생각하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남자아이처럼 보여도 상관없어.'
'널 상처 주려고 하는 게 아니야.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말해 줄래?'
이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정말 몰라서 딸이 한 거짓말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의 행동을 했을 테지만 너무 강압적이었다.
언제나 무지는 쉽게 상처를 주고, 부모의 외면은 어린아이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된다.
우리가 항상 무지한 상태로 남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누군가에게 쉽게 상처주기 않기 위해서다.
이 파란 드레스 사건 이후 로레는 또래 친구들로부터도 수모를 당한다.
알고 보니 여자였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역겨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두가 떠난 후 혼자 웅크리고 훌쩍 거리는 장면과
집에 있는 것이 더 재밌다며 나가 놀지 않고 개학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로레의 외면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위안 삼을 만한 것은 마지막에 건넨 리사의 질문이다.
"네 이름은 뭐야?"
로레는 작게 웃으며 진짜 자신을 소개할 수 있게 된다.
여태 로레를 규정하는 단서들에 대해 왈가왈부했지만 다 부질없던 것이다.
성별이 뭐든
머리카락이 어떻든
옷차림이 어떻든
보고 있는 그게 바로 로레인 것이다.
여자든 남자든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속 시끄럽게 그래서 너는 남자니 여자니를 묻고 있지만
사실 리사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별이 아니라 그 사람이 누구인지 하는 것이다.
나도 어떤 면에서는 로레같은 아이여서 공감이 많이 됐다.
치마 입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고, 주머니가 많이 달린 바지가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남자아이가 되고 싶었던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별개의 문제니까.
그냥 내가 싫은데도 여자니까 치마를 입어야 되고 파란색보다 핑크색 물건을 가져야 하고 이런 것들이 짜증 났을 뿐이다.
다행히 '싫어!! 하고 싶은 대로 할래!!' 했던 나를 '그래 크면 알아서 바뀌겠지' 하고 풀어두었던 부모님 덕에
비교적 성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더 넓은 세상에서는 날 그렇게 두지 않았지만)
사람을 껍데기가 아닌 그 본질로 바라보는 그런 세상이 보편적인 세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나도 그러기 위해서 노력할 테고.
로레와 우리의 행복을 성별 따위로 방해받게 둘 수는 없다.
로레가 조금 더 큰 세상은 이름쯤이야, 성별쯤이야 별 것도 아닌 자유로운 세상이면 좋겠다.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다시는 로레와 같은 아이들이 고민하고 상처 받지 않도록 젠더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학을 처음 배웠을 때 매 시간마다 나왔던 질문은 '섹스'와 '젠더'의 차이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십여 년간 섹스와 젠더를 크게 고민하지 않으며 살았던 나는 매번 설명을 들어도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사회적인 성별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나만 뒤쳐지는 것은 아닌지 강의실을 꽉 채운 대다수의 학생들이 젠더와 섹스를 매번 헷갈려했다.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섹스는 생물학적 성이고 젠더는 사회적인 성이다.
사회적인 성.
그 개념부터가 모호한 젠더는 그 모호성 때문에 어느 문화냐, 어느 시대냐에 따라서 바뀔 여지가 있다.
이게 바로 젠더의 한계이다.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따라서 절대 어떠한 것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
코에 붙이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되는 것.
본래 젠더가 등장한 이유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섹스가 단 두 가지 XX, XY만을 고려하고 있어서 이다.
수적으로 약세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XO, YO, XXX, XXY 등 다양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성/남성의 구분을 멈추고 모든 가능성이 포함될 수 있도록 섹스를 최대한 객관적인 상태로 발전시켰어야 한다.
그러나 젠더는 그렇지 않다.
사회적인 성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과 남성을 구분 지어 섹스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젠더가 왜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다.
조금만 과거를 돌이켜 보면 치마는 여자의 전유물 바지는 남자의 전유물이었으나 지금은 대다수의 여자들이 바지를 더욱 즐겨입니다.
긴 머리를 가진 남자를 보고 힐끔 대거나 짧은 머리의 여자를 보고 힐끔 대는 것도 얼마나 촌스러운 짓인지 다들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치마를 거부하는 여성은 남성성을 추구한다고 여겨졌고,
긴 머리를 추구하는 남성은 여성성을 추구한다고 여겨졌다.
그게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과 남성성, 젠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 여성성과 남성성을 구분 짓는 것은 아주 무의미한 일이 돼버렸다.
로레가 처한 상황이 안타까운 이유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로레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젠더 때문이다.
사회가 여성성과 남성성을 규정하지 않았다면 로레가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아이처럼 옷을 입고 남자 아이처럼 노는 로레에게
너의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학적 성별이 일치하지 않으니 둘 중 하나를 바꾸어 같게 하라고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너의 여자이든 남 자인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옷을 입고 축구를 하고 사랑을 해도 된다고 해주는 것이 좋을까?
젠더나 섹스를 바꾸는 것보다야 성별로부터 해방하게 돕는 쪽이 더 나을 것이다.
젠더는 허구이고 섹스는 아무것도 아니다.(한 개인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여성적이고 남성적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시대에 따라 배경에 따라 듣기 좋게 붙인 것일 뿐이고
쉽게 구분 지어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다.
단순한 성염색체의 배열로 하여금 예측할 수 있는 특성역시 아무것도 없다.
인간을 쉽게 구분하려는 두 가지의 잣대가 서로를 공고히 하며 사람들 억압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나의 생각도 또 변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원칙은 그대로일 것이다.
그 어떤 것도 한 개인을 억압하게 두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www.youtube.com/watch?v=4pQJR6inB-Y
아, 톰보이의 ost도 아주 좋다.
Para One & Tacteel의 <Always>
i love you always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