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 영화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이다.
블루 아워는 나름 내 안에서는 논란의 작품이어서 봤다.
포스터와 제목 그리고 심은경을 좋아하기 때문에 보려고 마음은 먹었으나 코로나 때문에 사리고 있는 추세라 안 보고 있었는데
짧은 후기를 보면 '기만'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포스터만 보면 청량한 힐링 듀오물일 것 같은데 개뿔 음울한 일본 영화라는 평이었다.
일단 첫째로 난 일본 영화는 애니메이션 빼고는 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그 음울함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둘째 어딜 봐도 힐링 듀오물이 맞다.
힐링물에 대한 미세한 정의가 사람마다 다를 것 같지만 나는 영화를 보면서 충분히 힐링되었다.
결 부분에서 반전이 나오면서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은데 나는 거기야 말로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성급한 일반화 일 수도 있겠으나,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야 미디어에서, 그것도 국가적 차원으로 줄곧 노출하는 것이 '정상 가족' 프레임이니 말이다.
나만해도 4인 가족인 것 외에는 하나도 정상 가족에 부합하다고 느끼지 못했고
다 큰 지금도 우리 엄마는 왜, 우리 아빠는 왜, 내 동생은 왜, 그리고 나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살았다.
조금 더 머리가 크고 나서야 사람들은 다 나처럼 살고 있고
어딘가 모르게 부족하고 이상한 게 오히려 평범한 것을 알게 되었지만.
물론 어딘가의 누군가는 미디어에서 그려 놓은 것 같은 가족으로 살고 있겠지만 궁금하다.
진짜 있긴 있으려나?
카호네 가족도 어떻게 보면 미디어에서 그리고 있는 전형적인 가족이다.
위와 달리 나쁜 예로.
가부장적인 아버지, 사회 부적응자 오빠,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어머니.
카호는 시골 출신으로 묘사되는데 그가 느끼는 묘한 거리낌이 나는 잘 이해가 되었다.
물론 내가 자고 나란 고장은 그렇게까지 비상식적이지는 않지만
도시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시 사람들이 '휴양지'로 환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부담을 느끼긴 했다.
사람 사는 곳이 여기나 거기나 다를 것도 없는데 특별한 무엇이 있을 거라 기대하니 말이다.
물론 거기에서 볼 수 있는 자연환경 따위를 나도 아주 좋아하지만
본격적으로 조경을 한 것만 따지자면 거기보다는 여기가 낫고
딱히 거기라서 볼 수 있다기보다는 앵간한 시골 가면 다 볼 수 있는 거니까...
기대를 하는 것도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다.
카호의 경우에는 가족과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더 심하게 그려진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영화이지만 심은경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주인공은 분명 카호이고 기요우라는 완전히 서브의 역할인데 심은경은 완벽한 씬스틸러다.
그러한 역할마저 아주 영리하게 계산했다는 게 잘 느껴진다.
카호의 세상에서 기요우라는 그런 캐릭터 터니까.
완벽히 서브에 불과하지만 정말이지 완벽한 서브.
개인적으로 크게 웃었던 장면은 어머니와 카호 그리고 기요우라가 다과를 즐기는 장면이다.
분명히 대화하는 것은 어머니와 카호이고 그 대화에 낄 수 없는 기요우라는 두 모녀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히 딴짓을 한다.
그런데 시선은 자연스럽게 기요우라가 가져가게 된다.
제법 진지하게 하는 대화는 당사자가 아니면 관심 가지지 않을 대화라 나도 자연스럽게 흥미를 잃었는데
나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딴짓하는 기요우라를 보면 공감이 되어서 웃음이 터진다.
기요우라는 카호의 세계에서 사는 낙원이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기요우라가 카호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잘 느껴진다.
바라보는 눈빛엔 언제나 과하지 않은 걱정과 안부가 담겨 있고
대화는 항상 '네'로 끝난다.
카호의 설명 없는 제안과 요구에 '왜요?'라고 물을 법한데도 알았다고만 한다.
그러면서도 수긍에 그치지 않고 카호가 솔직한 내면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이끌어 낸다.
이 과정 속에서 기요우라는 적극적으로 선을 넘는 다기보다는 카호가 그어 놓은 선 밖에서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직접 떡밥을 던진다기보다 기다리는 편에 속한다.
나는 이러한 기요우라의 무심한 섬세함이 타고난 성정이라고만 생각했다.
혹은 카호를 너무나 애정 하기 때문이거나.
상대를 자신만큼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굉장히 수준의 배려로 보였는데 역시나
카호가 기요우라고 기요우라고 카호였다.
카호가 곧 기요우라고 기요우라가 곧 카호라지만
둘은 정반대의 스타일로 보인다.
이를 테면 둘 다 시골에 대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관념들은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카호의 경우 시골을 생과 사가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촌스러운 곳'으로 느끼고
기요우라는 그런 시골을 생과 사가 맞닿아 있는, 그러므로 좀 더 '생생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촌스럽다는 것은 카호가 가진 또 다른 심한 콤플렉스이다.
언뜻 보았을 때 카호는 전혀 촌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직장에서는 프로페셔널하고 사생활은 쿨하다.
카호를 보면서 느꼈지만 그런 종류의 쿨함은 절대 인간이 타고날 수 없는 것이다.
만들어 내고 얻어내야만 가질 수 있는 인위적인 것이다.
고향을 떠난 후로 내내 지독하게 애썼기 때문에 카호는 쿨함을 얻어냈다.
이미지 상으로는 촌스럽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았던 장면을 꼽으라면
카호와 기요우라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외면하고 싶었던 것을 마주하고 난 카호는 감상에 젖어 감정들을 폭발시킨다.
그리고선 묻는다. '나 촌스럽지?'
여태껏 기요우라가 보여줬던 모습이라면 아마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 같지만
기요우라는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한다.
'너 원래 촌스러워.'
너 원래 촌스러워.
이 대사를 들었을 때의 카타르시스가 어마어마하다.
카호를 먹이려고 하는 말도 아니고 비꼬는 말도 아니고
태연한 얼굴로 순식간에 촌스럽다는 말의 뉘앙스를 반전시켜 버린 거다.
이전까지 카호가 알던 촌스럽다는 다듬어지지 않고 비상식적인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던 모습이었겠지만
기요우라가 말하는 촌스러움이란 곧 생이다.
카호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내 외면하고 싶었던 정상 프레임에서 속하지 못했던 자신의 배경.
그러나 그 안에 속하고 속에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카호에게 올곧은 지지를 보내던 기요우라는
이번에는 자신의 말로 카호의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장소가 어디든 사람은 치열하게 산다.
그리고 그 치열함은 어디에서든 추할 수밖에 없다.
다만 방식이 달라 거기와 여기의 서로가 이해하지 못할 뿐.
카호는 소녀가 부르는 곳으로 가 나를 만났다.
카호는 이제 여기에서도 거기에서도 생을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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