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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을 읽었다.

이로서 정세랑 작가의 작품 대장정이 끝났다.

출간된 책에 한해서 그렇다는 거지 웹진 등에서 연재한 작품들까지 고려한다면 아직 킵 고잉이다.

 

정세랑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참 보편적인 사람으로 느껴져서 좋다. 

재인, 재욱, 재훈은 가장 읽고 싶어서 아껴둔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책 표지의 손톱깎이, 레이저 포인터, 열쇠 이 세 가지 모두 한때 내가 아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 가만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열쇠와 레이저 포인터 그리고 손톱깎이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다.

지금은 내가 출입하는 모든 집들이 열쇠를 사용하지 않아서 (심지어 사물함까지도)

열쇠는 약간 먼 것이 되었고,

레이저 포인터는 애지중지 하던 게 고장 난 이후로 관심이 식었다.

단 하나, 스무 살 때 장만한 예쁜 공룡 스티커가 붙은 손톱깎이는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

 

초능력은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항상 동경하고 있는 참 멋진 무언가 인 것 같다.

그럼에도 뭐가 그렇게 멋있는지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는데,

그건 그간 히어로 물에서 나온 초능력들이 다소 거대하기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분명히 재인, 재욱, 재훈의 초능력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힘일 텐데

너무 화려하고 커서 본질을 가리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재인, 재욱, 재훈의 힘은 초능력이 가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힘이 초능력이자 초능력이 멋있는 이유이다. 

 

 

 


p.21
신비화는 대상이 멀리 있을 때나 가능하다는 걸, 인생에 구질구질하게 난입하기 시작하면 결코 할 수 없다는 걸 그런 식으로 깨달았다. 

 

어떤 이슈를 이야기할 때마다, 

특히 내가 겪지 못한 이슈를 이야기 할 때마다 너무 쉽게 타자화 해버리는 게 싫다.

정말 싫은데도 알면서도 타자화 해버린다. 

비겁하지만 일단 그게 쉽고 편하고, 이입을 해가면서 감정을 소비해 감당 해날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 '왜 그렇게까지'가 따라붙는 질문에 해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주 먼 사람일 수도 있지만

같은 땅을 밝고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이상 온전한 남이라고 볼 수 없다.

어찌 됐든 우리는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이웃의 일이라, 언젠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왜 그렇게까지 이입을 해.' 라던가 '그래서 네가 겪은 일이야?' 혹은 '너무 감정적인 것 같아.'라는 말 뿐인 것 같다. 

왜 감정적이면 안 되는 걸까.

사람들은 다가오는 4차 산업으로 인간성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런 두려움마저도 인간성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감정적인 게 뭐 대수라고. 인간이면 그럴 수밖에 없는데.

 

 

 

 

p.24
이십 대 내내 가장 힘들게 배운 것은 불안을 숨기는 법이었다고 말이다. 불안을 들키며 사람들이 도망간다. 불안하다고 해서 사방팔방에 자기 불안을 던져서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없다. 가방 안에서도 쏟아지지 않는 텀블러처럼 꽉 다물어야 한다. 

 

사람들이 볼 때 내가 불안해 보이는지 아닌지 궁금하다. 

너무 불안이 없는 것 같아 보여서 되레 불안해 보이지는 않는지 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는 말에는 동의하면서도

불행을 나눌수록 줄어든 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돌이켜 보면 고민이라던지 문제를 말한다 한들 해결되기보다는 고민만 늘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아마 보편적인 경험이기도 할 텐데

언젠가 지나가듯이 말한 고민을 수년이 지난 후에도 친구가 내 흠인 양 말한 적이 있었다. 

난 이제 그런 고민을 하는 애가 아닌데.

사실 그때도 고민이라고 말하긴 했어도 금방 해결되어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데.

그 작은 고민으로 내가 정의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근데 한편으로는 열심히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고민을 나누고 해결해 내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더디게 자라는 것은 저런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르겠다. 내 성격상 앞으로도 고민거리나 불안을 말하면서 해결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냥 더디더라도 내 길을 가는 게 내 스타일인 것 같다. 

 

 

 

 

p.59
크게 바뀔 것은 없었다. 인생을 바꾼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중한 기억이었다. 

 

살다 보니 진짜 나를 지탱해주는 기억은 인생을 바꾼 경험도 아니고 소소하지만 소중한 기억들인 것 같다. 

어린이집에 다녔을 적에 여름이면 바닷가에서 살았다.

정말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분리가 되지 않은 조립형 주택인 것 같은데, 

그래서 아주 넓었다. 

넓기만 넓고 네 면의 벽이 전부라 지금 생각해 보면 생활하기에 그다지 깔끔한 구조는 아니었을 거다. 

분명히 장소는 바닷가인데, 모래 장난을 하며 논 기억도 나는데

가장 많이 나는 기억은 그 집 안에서의 생활이다.

어릴 때는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이불만 넓게 깔아 놔도 설레 했다. 

이불에 파여 엄마 아빠 품에 파여 잠이 들고, 늦잠을 자고, 티브이도 잘 나오지 않는지 

매일 같이 후뢰시맨 비디오 3개만 주야장천 돌려보고 산책을 나가던 그 기억이 항상 큰 힘이 된다. 

엄마 아빠는 내가 그 시절을 이렇게 소중한 기억으로 손꼽는지 알지 모를지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사실 입 밖으로 낸 적 없이 혼자만 간직했는데

올해 어쩌다 그때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내 소중한 기억인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너무 어릴 때라 지금은 기억나지도 잘 안 나는데 왜 매 여름 그 고생을 했어?' 하고 물었었다.

그때 엄마가 해준 답을 듣고 나는 아주 행복했다.

'네가 바다를 좋아했어.'

엄마 아빠는 그 시절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만큼 행복했을까?

내가 이십 년이 흘른 지금도 또 앞으로 아주 행복한 여름으로 기억하고 있을 걸 알고 있을까?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두 팔 가득 사랑해줬던 것은 앞으로도 평생 경험하지 못할 것 같다. 

 

 

 

 

p.82
최대한 자연스럽게 재인은 다른 연구원들의 가운을 훔쳤다. 하나씩, 둘씩 티 나지 않게 주말에 집어 들고 왔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일어났을 때 주요 장기 손상을 막기 위해 재인은 동료들의 가운을 뜯고 그 안에 손톱으로 만든 판을 얇게 넣어 다시 꿰맸다. 판이라 해봤자 그보다는 필름에 가까웠다.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학원물을 좋아하는지도 몰랐으면서 좋아했다고 했었는데

범죄물은 전대물, 히어로물과 동급으로 좋아하고 영원한 나의 로망이다. 

범죄물이라고 묶기에는 어쩐지 좀 찜찜한데

파워레인저의 꿈은 대학교 2~3학년 때 접었지만

(접은 이유는 위대한 게츠비를 읽어서 이다. 23살의 게츠비의 모습을 보니 도무지 파워레인저를 꿈꿀 수 없었다.)

도적, 타짜, 해커 이 삼대장은 영원한 나의 로망이다. 

줄곧 도적 지망생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사실 뭘 훔쳐보진 못했다. 

작년쯤에 제법 골똘히 나는 왜 도적이 되고 싶을까 뭘 훔치고 싶은 걸까.

크게 탐나는 재화도 없고, 불로소득에 목매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도적일까 싶었다. 

내린 결론은 단어의 문제였다. 

도적이 아니라 의적이 되고 싶은 거였다. 

여기서 재인을 보며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초능력이 생기고, 누군가를 구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하는 일이 동료들의 가운을 훔치는 거다. 

열심히 훔쳐서 재봉틀질을 해서 꼬매고 속으로는 세탁과 다림질까지 하고 싶지만 참고. 

그간 기회가 오면 언젠가는 의적질을 한 번은 할 거야. 이렇게만 청사진을 그렸는데

오늘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아주 감쪽같이 훔쳐서 감쪽같이 돌려놓을 거다. 감쪽같이 나만 알게 누군가를 구해내고 싶다. 

 

 

 

 

p.132
무기를 가지고 있는 기분,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의지는 재인에게 활력이 되었던 것이다. 재인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자아이가 대부분의 이야기에서처럼 누군가에게 구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 여자아이가 다른 여자아이를 구하는 이야기. 

 

완전히 내 어린 시절을 그려 놓은 것 같다.

부끄럽지만 꽤 나이가 먹어서도 장난감 총을 가방에 가지고 다녔다. 

비비탄도 아니고 스티로폼? 총알이 나오는 건데

그걸 유용하게 쓸 상황은 

대학교 축제 때 누가 상품 쪽지를 높은 계단 아래에 붙여놔서 그걸 땔 때에나 쓰였다.

다들 도대체 내가 가방 속에서 장난감 총이 나오는 건지 의아해했지만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 순간의 내가 멋있엇다.)

어릴 때 즐겨하던 상황극은 미끄럼틀이나 정글짐에 갇힌 여자 애들을 구하는 거였다.

난 여자니까 왕자 같은 건 하기 싫었지만, 여자라고 어디 갇혀있고 구해지는 역할을 하는 것도 싫었다.

지금 쓰면서 생각해 보니,

도적에 대한 집착은 이런 반발심에서 온 게 아닌가 싶다. 

왕자는 남자였지만 도적에는 성별이 없으니까.

도적도 항상 어딘가에 갇혀 있는 무언가를 구출시키니 구원자의 역할도 하고 있고.

여자아이가 다른 여자아이를 구하는 이야기.

너무 좋다. 

기필코 여자 아이를 구하는 그런 여자 아이가 될 것이다.